▲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1896~1949)
[김승혜 기자]'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 원효로 서울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한 행려병자가 생을 마감했다. 사망진단서에는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은 65~66세로 기재됐다. 사망 당시 실제 나이는 52세. 병마와 굶주림으로 열 살 이상 들어 보였다.'

이 행려병자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여성 나혜석이다.

10일은 나혜석의 69주기.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은 다양한 음식점과 백화점, 영화관 등이 있는 번화가, 그곳은  '나혜석 거리'로 명명돼 있다.

그는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이곳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예술가적 자질과 외모를 겸비한 나혜석은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둘째 오빠 나경석(羅景錫)이다. 나경석의 권유로 17세에 동경 유학길에 올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부유하고 개명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 여성으로서 한국 최초 여류서양화가의 삶을 시작한 나혜석의 인생은 곧 조선 미술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일등 인생이었다. 진명여고 수석졸업을 시작으로 한국여성 최초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서양화 전공, 최초의 여류화가 개인전 등 성공신화를 써나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성공한 여성으로 살기에는 시대가 그녀를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 똑똑하고 자의식 강한 나혜석이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불꽃 같은 예술가적 혼을 가진 그녀의 영혼은 너무나 자유분방했고, 전통적인 결혼생활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른 나이에 그녀의 인생에서 첫사랑은 동경유학 시절에 만난 최승구였다. 시인이었던 최승구는 동경유학생 중 천재로 불리며 <학지광> 편집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최승구를 나혜석에게 소개한 인물은 오빠 나경석이었는데, 최승구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다. 집안에서 맺어준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와 나혜석은 유학지인 동경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나혜석은 절망하며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었다.

▲ 나혜석 개인 전람회 개최 기사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나혜석은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후학 양성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과년한 여식을 결혼시키려는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지켜본 그녀는 어머니와 다른 인생을 살고자 했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일본유학생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외교관이었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이미 결혼 전력이 있는 그와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년 연상으로 한 번 결혼했다가 상처한 상태였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19년 여름 변호사 자격을 갖고 서울에서 3·1운동 관련자들을 변호하기도 했고, 나혜석이 3·1일 운동 때 투옥되자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달려왔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였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개성을 이해하는 훌륭한 외조자로서 이 결혼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조건으로 김우영에게 4가지의 약속을 받아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 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김우영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요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김우영은 그녀의 희망대로 신혼여행길에 병사한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파격적인 결혼생활은 두고두고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설이 되었다. 공격의 선두는 남성들이었다. 인습에 젖은 그들은 그림을 위해 집을 비우는 나혜석을 비난했고,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아끼고 감싸는 김우영은 남자답지 못한 졸장부로 여겼다. 그런 세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외교관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자식을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나혜석은 1927년 남편과 함께 세계여행길에 나섰다. 자식까지 두고 세계 일주를 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녀는 어떻게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나의 그림은 어떤가” 하는 철학적·예술가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계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유럽여행은 그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서구의 여성운동과 지위 등을 견문할 기회가 되었다.

답답한 조선사회와 달리 서구사회는 그녀에게 유토피아였고 해방구였다. 그러나 세계여행은 그녀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파리에서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3·1운동 때 함께 투옥된 경험이 있고 취미가 다양하며, 그림에도 조예가 있는 최린은 한순간에 나혜석을 사로잡았다. 법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난 김우영은 최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했다. 남편이 떠난 뒤 시작된 두 사람의 깊은 교제는 재불 조선사회를 시작으로 조선까지 널리 소문이 퍼졌다.

귀국한 뒤 나혜석은 생계가 곤란해지자 최린에게 도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내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오’라는 편지 내용은 아는 지인을 통해 와전되어 남편인 김우영의 격노를 샀다. 이때는 이미 최린의 관계를 한 번 용서한 뒤였다. 두 번의 용서는 없었다.

김우영은 이혼을 청구하면서 만일 승낙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발한다고 했다. 나혜석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댁 식구들 또한 이혼을 종용했다. 나혜석은 이혼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하는 수 없이 추후 2년간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 재결합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그러나 김우영은 곧 다른 여성과 결혼하였다. 재결합을 희망한 나혜석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재혼한 김우영 또한 배신감과 함께 가정을 지키지 못한 못난 남자라는 낙인으로 고통을 받으며 그의 인생 또한 무너져 내렸다.

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나혜석은 가정뿐만 아니라 연애와 섹슈얼리티에서도 남녀의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이중성에 항의를 했다. 불륜을 저질러도 남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는데, 온갖 비판이 여성에게만 집중되는 불합리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 그러한 생각은 남편 김우영이나 연인 최린과의 관계, 이혼에 이르는 구체적인 경험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남편과 세상을 향한 [이혼고백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나혜석은 최린을 고소하였다. 고소내용은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였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자 최린은 나혜석의 생활비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혜석은 이혼당하여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받아 신경쇠약증까지 걸려 있는 상태였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위자료 1만 2천 원을 배상하라고 청구했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자신과 달리 최린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합리했던 것이다.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한 남편이나 최린 모두 실질적인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는 여느 남성과 차이가 없었다.

“나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과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을 뿐이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다.” 이러한 나혜석의 고백은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자유로운 연애관은 프랑스 남녀연애관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사회에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자유연애였다.

사회적·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은 엘리트 여성 나혜석. 그녀의 여성해방론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의식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종래 금기시됐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녀불평등까지 포함하여 그간 수백 년간 지켜졌던 정조관념을 깨부수고자 했다. 그녀의 이러한 여성해방론은 진정 진보적인 것이었을까. 그녀는 죽기 전까지 보고 싶은 자녀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여성으로서는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천륜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모성애를 가진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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