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임기 2년가량을 앞두고 옷을 벗었다.

권 회장은 18일 오전 8시 서울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임시 이사회를 마친 뒤 "경영권을 넘기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이사회도 승낙했다"며 사임 의사를 알렸다.

일각에서는 포스코와 KT 등 민영화 기업들은 정권이 전리품으로 여기고 있는 탓에 CEO들의 잔혹사가 이어지고 있다고 풀이한다. 포스코가 정치권의 입김에서 벗어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풍토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포스코가 한국경제에서 점하는 위치는 독특하면서 소중하다. ‘산업의 쌀’을 만드는 기업이라거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회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포스코는 전문경영인 체제다. 2000년 민영화 뒤 정부 주식이 전혀 없는 순수 민간기업이다. 오너 2,3세들이 이끄는 우리나라 특유의 재벌체제 하에서 대기업으론 드물게 주인 없는 전문경영인 시스템을 구축,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민영화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최고 경영자의 운명은 변한 게 없었다. 형식상 독립적 지배구조이면서도, 실상은 극심한 정치 외풍에 시달려왔다. 대부분 CEO는 단명했고, 불명예 퇴진한 CEO도 한 둘이 아니었으며, 누구든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항상 뒷말이 이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권 회장처럼 임기를 마치지 못한 전임 회장 사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포스코는 2000년 9월 정부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민영화됐지만,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수가 중도 하차했다.

전임 회장들이 공식적으로 밝힌 사임 이유는 다양했지만, 정권 교체와 관련이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권 회장의 전임인 정준양 전 회장(2009년 1월∼2014년 3월)은 권 회장과 비슷한 전철을 밟다 사임했다.

정 전 회장도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국빈만찬과 10대 그룹 총수 청와대 오찬, 베트남 국빈방문 사절단 등 대통령이 참석한 주요 행사에서 배제됐다.

또 국세청이 서울 포스코센터, 포항 본사, 광양제철소 등에 대한 동시다발적 세무조사에 착수하면서 사퇴 압박용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정 전 회장은 사임 결정에 외압이나 외풍은 없다고 밝혔지만, 재계에서는 이런 해명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정 전 회장도 2013년 11월 이사회에 사의를 표명할 당시 연임에 성공해 임기를 1년 4개월가량 남겨둔 상태였다.

이후 정 전 회장은 포스코의 민원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됐지만, 작년 11월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구택 전 회장(2003년 3월∼2009년 1월)은 2007년 봄 한차례 연임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1년 뒤인 2009년 초 정치권 외압 논란 와중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전 회장은 2008년 말부터 검찰이 이주성 전 국세청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포스코가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했다는 혐의를 잡고 수사에 나섬에 따라 결국 사퇴 수순을 밟았다.

이 전 회장은 "외압이나 외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문경영인과 사외이사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불식시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정권 차원의 외압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포스코의 민영화 전에는 고(故) 박태준 초대회장(1968년 4월∼1992년 10월)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불화로 사임한 것을 비롯해 1992∼1994년 사이 황경로(1992년 10월∼1993년 3월)·정명식(1993년 3월∼1994년 3월)·김만제(1994년 3월∼1998년 3월) 등 무려 4명의 회장이 잇달아 바뀌었다.

김만제 전 회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그의 후임인 유상부(1998년 3월∼2003년 3월) 전 회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에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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