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 '이건희'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만약 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100명까지만 '진짜 슈퍼 리치'라고 정의한다면, 한국에는 아직 슈퍼 리치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한국의 최고 부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이건희란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지난 7월 29일 블룸버그통신이 집계한 '세계 500대 부자'에 따르면 74위로 총 자산규모만 179억달러(약 21조원)를 기록했다. 
 
이 회장은 빌 게이츠가 미국에서 갖고 있는 위상에 버금가는 강력한 권력을 한국에서 갖고 있다. 삼성 그룹은 2010년 연 매출액이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2%에 달한다.
 
언론 보도에서 드러나는 삼성가(家)의 위상은 그야말로 '왕족'이다. 영국에서 왕실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는 타블로이드 신문 못지않다. 심지어 "이건희 회장이 삼성동 본사에 출근했다", "오늘은 아들 이재용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이서현 부사장이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 같은 내용까지 보도될 정도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 자택에서 호급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수술을 받았고, 이후에도 삼성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이병철 선대 회장 사망 이후 1987년부터 삼성그룹 회장을 지냈고,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진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10년 3월에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처음부터 이렇게 거대한 삼성 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의 차남도 아닌 삼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건희는 레슬링을 즐겨 하고 역도산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소년이었지만, 다혈질인 장남 이맹희에 비해 차분하고 생각이 깊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대 사대 부속중학교로 편입했고 이어 서울 사대부고로 진학했다.
 
호암이 삼남인 그를 후계자로 눈여겨 본 것은 그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한비사건)' 이후였다. 이 사건은 1966년 5월 삼성 계열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55톤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오다가 들통 났던 일이다. 훗날 당시 현장지휘를 맡았다고 밝힌 장남 이맹희씨의 회고록 『못다한 이야기』에 따르면, 호암은 한국비료 건설 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로부터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안 받았다. 그리고 이 돈을 들여오기 위해 박정희 군사 정부의 묵인 하에 기계, 양변기, 사카린 등 각종 상품을 국내에 밀수했다. 그러나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인분을 투척하는 등 국민적 공분이 일어났다. 결국 책임을 지고 호암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차남 이창희는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맹희는 아버지 대신 삼성 그룹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1966년 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이건희는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MBA를 수료하고 막 귀국해 삼성 그룹 계열사인 동양방송에 입사했다. 1967년에는 1964년 설립된 동양방송의 초대 사장이었던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했다.
 
그런데 호암은 다혈질적인 이맹희의 경영이 미덥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맹희의 경영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6개월도 안 되어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고 썼다. 이에 따라 호암은 1969년부터 다시 경영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건희는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는데, 삼성가에서는 이때부터 호암이 이건희를 후계자로 여겼다고 보고 있다. 1970년쯤 이창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버지를 탈세 및 외화 밀반출 등의 혐의로 밀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호암은 이맹희도 모반에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일보」 기자였던 이용우 씨가 집필해 2012년 발간한 『삼성가의 사도세자 이맹희』라는 책은 이 과정에서 삼성의 가신그룹 등 이건희를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세력이 부자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1973년 호암은 이맹희의 주요 직함을 내려놓게 하고 경영에 사실상 복귀했다. 충격을 받은 이맹희는 일본으로 떠났고, 이창희 역시 '마그네틱 미디어 코리아(새한미디어의 전신)'를 설립하며 스스로 삼성을 떠난다. 1976년 호암이 위암 수술을 받으러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이건희를 제외한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호암은 이건희를 후계자로 공표한다.
 
그리고 곧이어 1977년 삼성 그룹의 미래를 가르는 결정의 순간이 온다. 파산 위기에 몰린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이었다. 당시 이건희는 "반드시 한국반도체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삼성은 1977년 12월 30일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이듬해 '삼성반도체'로 이름을 바꿨다. 2년 뒤인 1980년에는 삼성전자와 합병했다.
 
1979년 이건희는 삼성 그룹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왕좌'를 물려받는데 탄탄대로만 펼쳐졌던 것은 아니었다. 호암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88년 이맹희를 인터뷰했던 미주 한인신문 「선데이저널」에 따르면, 부회장으로서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았던 이건희는 1983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후유증이 심각해 오랫동안 집무실에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1986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삼성 그룹에 상무이사로 입사한 이태휘(호암의 일본인 부인이 낳은 아들)가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며 총애를 받았다. 자칫 후계구도에 변화가 오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호암이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나자, 1986년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된 신현확 전 총리는 직접 회의를 열고 유족들을 설득해 이건희를 2대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삼남이 드디어 대권을 쥐게 된 것이다.
 
▲ 이건희 삼성전저 회장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이건희 회장은 취임 후 얼마 안 되어 열린 삼성 그룹 창업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이어 선친의 유언대로 큰형 이맹희의 부인 손복남 여사와 아들 이재현에게 제일제당(현 CJ) 그룹을, 이창희 가에는 제일합섬(이후 새한 그룹)을, 큰누나 이인희에게는 한솔 그룹을, 막내 이명희에게는 신세계를 맡겨 독립시킨다.
 
이건희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는 작업도 진행했다. 자신을 2대 회장에 추대한 공신이지만 지나치게 큰 영향력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아버지의 가신' 신현확 전 총리와도 경영권을 확고히 한 1991년 완전히 결별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렇게 가신을 정리한 당사자가, 이학수라는 비서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학수는 이재용에 대한 경영권 승계 등을 주도하면서 삼성 그룹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다가,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불거진 비자금 사태 후에야 물러나게 된다. 2010년 주어졌던 '고문'이라는 직함도 2011년 12월 정기 인사 때 완전히 없어졌다. 세간에서는 이학수가 회사 몰래 강남에 2,000억 원대 빌딩을 소유한 것이 드러났던 점을 포함해서 '삼성 그룹의 전략기획실장', '이건희 회장의 오른팔'로 군림하면서 상당한 규모의 축재를 했던 것을 이 회장이 뒤늦게 알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건희의 경영 스타일은 세밀한 경영사항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큰 그림'에 대해 가끔 무게 있는 한 마디를 던지는 식이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이건희는 도쿄에서 회의를 마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다가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전달 받았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삼성 세탁기의 뚜껑이 잘 맞지 않는 불량이 생겨 이것을 억지로 맞추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건희는 충격을 받아 사장단과 핵심 간부를 호출하고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고 호통을 친다. 또 1995년 무선전화기 품질 불량 사건이 터졌을 때는 500억 원 상당의 불량 제품을 쌓아 놓고 화형식까지 하며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결국 삼성전자 제품의 품질은 나날이 향상되었고, 지금은 최첨단 제품인 스마트폰을 바탕으로 분기당 6조 원의 이익을 내는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이사장이 있다.
 
삼성전자는 이날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며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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