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머니투데이 '더리더' 갈무리
[정재원 기자] "정권 교체에 목마른 야당의 당심과 흑백 정치의 퇴장을 요구하는 국민의 마음이 서른여섯 이준석씨를 제1야당 국민의힘 당대표로 밀어 올렸다. 40대 기수론 등장 이후 50년 만에 출현한 30대 주역의 정치 지진이다."
 
12일 강석천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30대 이준석 당대표의 등장을 이같이 표현했다. 
 
그러면서 "IT 혁명 속 미국과 일본 간 우위(優位)가 또 한번 뒤집어졌던 1980년대 공격하는 미국 측 리더는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 등 1955년생이 주축이었다. 성(城)을 지키던 도시바·후지쓰·NEC 등 일본 대표 기업 리더들은 거의가 1920년생이었다. 젊은 미국이 20·30년 더 멀리 내다봤고 이것이 미·일 대역전의 세대 요인이었다. 국민의힘은 돌파하는 야당이 돼야 한다. 젊은 공격수들을 전면(前面)에 배치해야 한다. 노숙(老熟)한 평붕에 둘러싸여야 젊음도 돋보인다. 세대 연합의 이점(利點)도 봐야 한다."고 그의 등장을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의 등장을 오버랩했다.
 
지난 2015년 12월 31일 머니투데이 '더리더'에서는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 표창원 소장이 매월 여·야 정치인과 지자체장, 공기관장 중 차세대 리더로서 주목해야 할 인물로 이준석을 조명했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이야기한 프랑스 혁명의 영웅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의 나이 27세.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제 1대 황제로 ‘삼국지’의 영웅인 유비가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관우, 장비와 함께 토벌에 나섰을 때 그의 나이 24세. 일제강점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해방운동에 앞장섰던 한국 역사의 영웅 유관순 열사의 당시 나이 18세. 나라를 위해 몸바친 난세의 영웅들에게는 나이도, 성별도 중요치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리더의 부재에 목마름을 느끼며 단비를 내려줄 영웅을 애타게 찾고 있다.
 
이준석, N포세대를 구하라
 
연륜과 경험 많은 Old Man 중심이었던 정치판에 ‘젊은 피’가 수혈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다. 2011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강도 높은 쇄신안을 발표하면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박근혜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구성된 비대위원 중 국민들에게 전혀 생소한 ‘이준석’이라는 청년이 나타났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하버드 출신에 교육 벤처기업의 대표이자,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교육봉사단체를 이끌었던 그에게 엄청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을 대표하는 ‘여당스러운’ 인물이 아닐까, 아니면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의 교육과 복지문제를 주장하는 ‘의외로 개념 있는’ 인물이 아닐까 등등 그를 둘러싼 말들은 그의 등장만큼이나 무성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의원시절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며 직접 발탁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박근혜 키즈’로 불리며 정부가 잘못된 행태를 보일 때마다 그는 어떤 발언을 하는지 늘 주목 받는다. 하지만 이준석은 젊은 패기만큼이나 할 말은 하는 ‘직언파’다.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냐고 물으면 “할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딨느냐?”고 반문할 만큼 당차다.
 
‘표창원의 리더인사이드’ 신년호의 주인공은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클라세 스튜디오 대표다. “제 나이에 어떻게 하면 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해요.”라는 말에서 꿈 많고, 욕심 많은 청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2016년, 조심스럽게 대한민국에 필요한 젊은 리더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하버드대 출신 이준석, 그를 둘러싼 금수저 논란
 
표창원: 요즘 아주 왕성한 활동에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은 제가 며칠 전 인터뷰에 앞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친구들한테 이준석 위원에게 궁금한 질문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준석: 네, 감사합니다.
 
표창원: 우선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이준석 위원 개인의 삶에 대해 여쭙고 싶고요. 어떤 비전이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준석 위원이 1985년 3월 생이에요. 전두환 군사정권의 제 5공화국의 정점에 태어났고, IMF 경제위기가 올 때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였잖아요? 간단하게 그 당시에 느꼈던 것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면요?
 
이준석: 저희 아버지가 처음 집을 사서 정착한 곳이 노원구 상계동이에요.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서울 내 이주의 역사만 봐도 한 가정의 모습이 그려지거든요. 어렸을 때 상계동에 살다가 아버지가 해외로 발령이 나서 싱가폴과 인도네시아에 1년씩 있었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정착한 곳은 목동이었어요. 목동에서 전세로 살다가 제가 서울과학고에 진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가 살았던 상계동과 목동이 대변하는 것이 무엇이냐? 딱 중산층의 위치라는 것이에요. 처음 정착했을 때 변두리지만 어쨌든 서울의 삶을 살려고 했던 아버지의 생각이 지금은 이제 약간 이해가 되요. 그리고 목동은 상징적으로 학군을 언급했을 때 좋은 곳이죠. 상계동의 집을 팔고 목동에 전세로 오기까지 어떻게든 자식들 교육 잘 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투영되지 않았으면 그런 판단들을 못했을 것 같아요.
 
표창원: 이 질문부터 드리는 이유는 이준석에게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 중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혹시 ‘금수저’아니냐?” “같은 세대 젊은이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성장하면서 현대사회의 어려움들, 시기적인 것들을 몸으로 겪지 않았기 때문에 가진 자의 정당이라고 하는 새누리당에 간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준석: 사실 ‘금수저’라는 표현을 하려면 어느 정도 자산으로 인해서 이득을 본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대학교 빼고는 사립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남들처럼 동네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의 경제력으로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것은 제 인생의 전반기보다는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등장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인 것 같아요. 아주 음모론적인 시각을 가지신 분들의 경우 “숨겨둔 박근혜 아들이다.”라는 등 별의별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웃음) 왜냐면 그분들이 보기에 정치권에서 이준석의 등장에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겠죠. 정치현장에서 뛰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노력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분들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 단박에 큰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또 어떤 불합리한 이득의 영역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고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어떤 노력의 연장선들이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저를 발탁한 사람도 인정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창원: 하버드 대학교 재학 당시에 그러면 사회나 세상,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들을 형성했나요?
 
이준석: 우선 해외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잖아요? 애국까진 아니더라도 환상자체는 많이 사라지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이런 거에요. 한국에 와서 젊은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많은 것을 시스템 담론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교육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하버드에서 경험해봤지만 거기라고 커리큘럼이 아주 창의적이진 않아요. 그리고 저도 현재 구멍가게 벤처를 하지만 “창업에 있어서는 미국이 더욱 월등한 환경이다.” 이런 것들… 그런 담론들에 대해 저는 경험해보고 이야기 하니까 환상 없는 담백함은 있는 것 같아요.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게 현실주의자적 측면도 있지만 적어도 제 삶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첫째로 외국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으면서 문제를 오히려 국내에서 해결해보려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 변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도 똑같아요. 제가 비대위원이라는 고위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게 나쁜 부분도 있었겠지만 좋은 부분이라면 적어도 환상은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치권에서 어쨌든 새누리당 최고위원 격으로 있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오르고자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나 기대는 억제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정치에 열망을 가지신 분들을 30대나 40대부터 공천받기 위해 노력하고, 50대 60대가 되어 입성하는 분들도 계신데 그분 들은 목표 자체가 입성인 것 같아요.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적어도 그런 환상은 깨졌기 때문에 입성 자체가 중요치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정치권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교육봉사단체를 하고 인정받으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비대위원이 된 것이 2011년 12월 26일 이었는데, 딱 2달전인 10월 26일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사람이 박원순 서울시장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거죠. ‘아… 우리나라 정치의 범주가 예전에는 국회에 앉아있던 300명의 소수관료들이 하던 정치였다면 이제는 사회가 바뀌어서 넓은 의미의 정치, 세상을 원하는 대로 바꾸고 싶어하는 동력을 정치라고 본다면 이런 정치도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겠구나.’ 라는 것을 알았죠.
 
박원순 시장의 경력은 시민단체에 있으면서 참여연대와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던 건데 그 이력만 보고 대통령 다음가는 선출직이라는 시장에 뽑혔죠. 그리고 일각의 우려와는 다르게 한 임기를 마치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서 ‘아, 광의와 협의의 정치의 경계가 이렇게 허물어지는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저한테 출마 할꺼냐고 묻는 분들이 있으면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제가 방송을 하고 봉사단체를 하며 가진 영역의 틀 안에서, 제 나이대에서 어느 것이 더 세상을 많이 바꿀 수 있느냐라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자꾸 좌고우면 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저한테는 진실한 고민인 것 같아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더 제 나이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때문인 것 같아요.
 
청년 리더, 합리성의 증진을 꿈꾸다
 
표창원: 이런 건 어떨까요?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43세고, 영국의 캐머런 총리도 40대고, 국가지도자들이 상당히 연소화가 되면서 그 효과가 국가에 활력을 넣어주는 것 같아요. 게다가 그들 모두 보수 쪽이지만 성소수자 권리증대라던지, 여성의 절반 내각진출 이라던지, 과거 원주민 학대에 대한 반성 이라던지 대단히 혁신적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데…. 이준석 대표가 만약 젊은 지도자가 된다면 어떨까요? 우리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이준석: 제가 정치활동 하면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원론이에요. 원론이라 한다면 토론회도 나가고 SNS에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논쟁하기도 하는데 정치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지금은 합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책구조, 투표성향, 갈등의 과정을 보이고 있거든요. 저는 합리성을 최대한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영국이나 캐나다는 이런 합리성의 단계를 뛰어 넘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가치에 대한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거든요. 지금은 같은 상황에서 뭘 던져도 비아냥과 조소가 나옵니다. 합리성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표소장님도 겪으셨겠지만 국정원의 잘못된걸 비판하면 “안보에 관심이 없는 거냐?” 이런 식의 논리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새누리당을 비판하면 “너는 야당 넘어갈려고 하는거냐?”는 식이고, 꼭 모든 사람들에게 보수냐 진보냐를 물어야 직성이 풀리고… 이런 것들에서 탈피를 해야겠죠.
 
표창원: 새누리당이라는 정당자체와 우리나라의 집권세력, 기득권층이 그런 합리성을 우리사회에 가져오는데 가장 저해, 방해하는 분들이다라고 보는 시선이 꽤 계시잖아요? 그래서 이준석 위원처럼 대단히 합리적이고 진취적이고 젊은 분이 왜 그분들과 함께 하느냐 하는 비판을 많이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이준석: 저는 근데 이런 생각을 해요. 양비론이 되면 모르겠지만 지금 그 합리성의 영역에 있지 않은 것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전에 모 연예인이 친노당 전라도당 했다가 곤혹을 겪기도 했지만, 꼭 그렇게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야당에는 속된말로 ‘계파주의’가 너무 팽배하단 느낌이 들어요. 여당의 경우 기득권 논리가 우세했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도 제가 여당으로 온 이유는 뭔가 바뀐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죠. 새누리당 이전에 한나라당은 십 몇년 동안 당명을 유지해오면서 한나당의 과거와 과오까지 모두 들고 왔거든요. 책임정치를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좋아했던 것이었어요. 야당은 변화가 너무 잦았고 ‘새정치’라고 하면 또 거기 쫓아가고 하는 식의 부화뇌동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는 그런 형태가 싫었어요. 그래서 그걸 믿고 새누리당에 알박기를 해놓은 것입니다. 언젠가 10년이 지나서 제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당은 갑자기 없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는 거죠.
 
갈림길에 선 이준석, 고민의 끝은?
 
표창원: 어쨌든 이번 총선,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겠지만 새누리당도 그렇고 이준석 위원 본인에게도 그렇고요. 아직 결심을 굳힌 건 아닌가요?
 
이준석: 계속 이야기하지만 속된말로 광의의 정치냐 협의의 정치가 옳으냐를 아직도 고민하는거죠. 보수의 진영 속에서 초선의원으로서 지금 초선의원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저렇게 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제가 가지고 있는 언론의 노출도를 이용해 온건보수적인 것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옳으냐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고민 중입니다.
솔직히 제가 비대위를 했을 때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제안에 대해서 판단할 때 이런걸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최연소 타이틀을 한번 따볼까? 김영삼 이후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 볼까?’ 하는 허세가 잡혀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더 정치를 잘 이해하고 큰 틀에서 보다 보니 ‘내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최적화된 경로는 어디인가?’를 계속 묻게 되는 거죠. 지난 번에도 고민을 했지만 지난 번과는 다른 궤의 고민인 것 같아요.
 
표창원: 어쨌든 정치의 길로 들어섰으니까요. 4년 가까이 지났고, 초선의 벽은 언제든지 넘어야 되는 것이고요. 40대 정도에 정말 중요하게 우리 사회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지금은 시작을 해야 되지 않은가 싶은 대요?
 
이준석: 그래서 그것도 항상 고민이에요. 별의별 생각 다 들어요. 어떤 분들은 이길 것 같으면 나가고 질 것 같으면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거엔 관심이 없어요. 진다고 해서 망할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한가지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진짜로 많았는데 정치를 전업으로 하게 되면 그걸 버려야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이에요. 배나사에서 가르치던 것들을 포기해야 되는가… 그리고 제 나이이기 때문에 하는 고민들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포기해야 되는 건가? 같은 것들… 저도 되게 속물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제가 지금 완전한 경제적 기반을 잡지 않고 정치권에 갔을 때 경제력이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하고… 어찌 보면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건 정치보다도 더 큰 고민인 거 같아요.
 
기회의 평등 보다는 결과의 평등
 
표창원: 세상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말씀을 들어보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서, 아주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하진 않게 자라고, 열심히 경쟁해서 하버드 대학까지 가고… 그러면서 환상에 대한 깨짐을 겪었기 때문에 급격하게 사회를 바꾼다 던지, 시스템을 뜯어 고친다는 생각을 한다던가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준석: 시스템을 뜯어 고친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분배를 급격히 늘린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급격한 변화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정부의 창조경제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준비가 안 되어있으면 돈을 더 투입한다고 해서 성과가 나지 않는다는 걸 3년째 증명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급격한 변화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한계를 절감한 것이고, 저는 좀 더 근본적인 것들에 투자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관심 갖는 분야가 교육입니다.
 
제가 85년생으로서 가졌던 공교육에 대한 학업의 기대치와 지금 대학교 1학년인 95년생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치나 목표치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은 퇴임했지만 황우여 부총리도 그렇고 이번 정부 들어서 공교육의 내용을 줄이는 형태로 가고 있는데 저는 거기서 접근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는 교육을 내세우면서 첫째로 기회의 평등이란 말을 많이 했던 것 같고, 둘째로는 창의적 교육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들을 굉장히 많이 했었어요.
 
기회의 평등이란 말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어감과 달리 많이 변질된 것 같아요. 기회의 평등에 있어서 정부가 좀 더 교육에 책임 있는 자세라고 한다면 기회의 평등보다는 초중등 교육에서는 '결과의 평등' 정도까지는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적어도 어떤 수준의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요.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확신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가적으로 스펙을 요구하게 되고, 이것이 또 다른 경쟁을 요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요. 지금 창조경제에 투입될 예산이었다면 이번 임기 내에 실현하기 보다는 10년 뒤 실행을 예상하고 초·중·고에 엄청난 투자를 했어야지 우리가 나중에 그 결과를 볼 수 있는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서 그런 근시안적인 정책들을 회피해보고 싶단 생각이 많아요.
 
표창원: 이준석식 세상의 변화라고 한다면 보수의 시각에서 현재의 시스템을 확실히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특히 교육이라고 한다면 고등학교, 대학까지 의무교육의 확대와 국가의 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과 개입의 확대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이준석: 새누리당이 2012년 2월에 당명을 바꾸면서 정강정책을 바꿨어요. 정강정책은 당의 헌법과도 같은 조항들이에요. 당원이라면 이해하고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그 당시 정강정책을 개정하는 소위원회에 들어가있으면서 약간 알박기 식으로 해놓은 게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고등학교 교육의 완전한 무상화를 추구한다.'라고 되어있어요. 무상화는 단순 수업료 무상화가 아니에요. 방과후 학교비, 그에 수반되는 급식비, 교복비, 준비물비까지 포함할 수 있는 포괄적인 형태의 무상화를 추구한다 라고 되어있어요. 그게 우리 당이 꼭 이루어야 할 정강정책중의 하나라는 것을 새누리당 당원들은 까먹었을 거에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것을 알박기 해놓은 거죠. 그래서 저는 그 희망을 아직 갖고 새누리당에 미련이 많이 남아있어요.
 
표창원: 지금 많은 사람들의 시각은 '고등학교 교육의 전면 무상화’라고 한다면 새누리당이나 보수정책이 아니라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이준석: 그런 면에서 새누리당이 인기영합주의에 빠졌다는 거에요. 고등교육 무상화를 제가 집어넣은 이유는 교육이 중학교까지는 의무화가 되어있지만 중학교 끝나고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진학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청년토론회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 화두가 반값등록금이었어요. 제 소견은 이랬어요. 
"반값등록금도 물론 공교육의 영역을 확장하는 취지에서 유의미 하다. 하지만 초·중등교육은 의무화 교육이고 고등학교 교육은 공공성을 크게 인정받지 못해서 많은 지원이 못 이루어지고, 오히려 그보다 고등교육인 대학교를 반값등록금을 시행하는 것은 허리를 끊어먹는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거기서 제가 놀랐던게 진보영역에 있는 한 청년 대표가 저한테 "그래도 고등학교는 돈 없어서 못 다니는 학생은 없지 않습니까?"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확실히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구호로만 접하는 사람과 현장에 있는 사람은 다르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전 개인적으로 반값등록금이라는 구호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목표를 선명히 봤던 것이 표를 가진 대학생들에게 어필하자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인기영합주의였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학등록금 지원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우선순위를 고등학교에 두자는 것에 대해 그렇게 나왔던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반값등록금에 투입되는 재정이 4~5조 정도 되는데 고교무상화는 그 돈이면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육을 먼저 정상화 시키고 대학의 지원을 늘려가는 것이 순리인데 그것이 끊어지다 보니 고등학교 교육이 오히려 민간에 떠넘겨져 사교육비가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솔직해졌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한테 동일한 예산을 주고 지급할 권한이 있다면 저는 고등학교에 먼저 넣을 것 같습니다.
 
새누리당 비대위원 이준석, 그가 정치를 택했던 이유
 
표창원: 앞서 계속 이야기 해준 이준석 위원이 대표로 있는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은 차상위계층과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활동이었죠? 그것으로 인해 새누리당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이준석: 제가 군대를 병역특례로 다녀왔어요. 그런데 제가 병특을 시작하기 전이 언제였냐면 싸이씨가 군대를 재입대 했던 시기였어요. 한창 산업기능요원에 대한 요건이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되던 시기에요. 산업기능 요원하면서 일반적으로는 명문대 출신의 경우에는 과외도 하고 하는데 저는 꿈도 못 꿨어요. 그런데 제가 또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그래서 뭘 해볼까 하다가 비영리단체를 하게 됐어요. 비영리단체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시작을 했어요. 
 
보통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생계걱정을 하고 힘들어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3년 동안 어쨌든 직장을 다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월급 받으면서 비영리단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잘 될 수밖에 없었죠. 정부지원금 받으려고 쫓아다닐 일도 없고, 소설 쓰고 있을 이유도 없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경험 속에서 재미있는 일도 생기고 사람들도 만나다 보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저한테 가장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저는 보통 배운 대로 하는 성격이었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불 나면 119에 신고를 하잖아요? 도둑이 들면 112로 신고해라. 저는 이런 것들을 곧이 곧대로 하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배나사에서 가르쳤던 학생 중 하나가 졸업 후에 저를 찾아왔어요. 그때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었는데 갑자기 교복치마를 확 들어올리면서 허벅지를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너 어린애가 왜 이러냐 미쳤냐?" 이랬는데 그 허벅지 위에 빨간색으로 맞은 자국들이 굉장히 많은 거에요. 이게 뭐냐고 했더니 엄마한테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학생이 얘기하기를 "선생님, 사실 제가 13년동안 엄마한테 가정폭력을 당했는데 그동안 말을 못했던 거에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너희 엄마도 만나봤는데 그럴 분이 아닌데 무슨 소리냐?"고 했어요. 왜냐면 그런 걸 저는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그건 그냥 어디서 상처 입은 거 아니니? 맞았으면 뒤에 상처가 났겠지." 하니까 학생이 얘기하기를 "제가 중2때부터 엄마보다 키가 커지니까 이제는 엄마가 저를 의자에 묶어놓고 때려요." 하는 거에요. 저는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의자에 묶어놓고 때리면 그렇게 된다는 걸.
 
그래서 그때 그 애를 빼내서 저희 집에서 재웠어요. 제가 여동생이 있어서 여동생이랑 함께 지내게 하면서 그동안 청소년보호시설을 알아봤어요. 그 사이에 또 그 엄마가 음독을 하고 그랬어요. 병원에서 위세척을 해서 살아났는데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엄마한테는 도저히 애를 못 보내겠는거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해서 마포구 쉼터로 보냈어요. 그런데 다음에 더 충격 받은 것이 1년쯤 지나서 제가 잘 지내냐고 연락했더니 그 아이가 이렇게 답하는 거에요. "선생님, 저 이제 엄마한테 맞는 게 아니라 여기 상급생한테 맞아요." 하는 거에요.
그 순간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사회적으로 일반인보다는 더 관심있어 하고 책임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거였거든요. 그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너무 심했던 거죠. 그런데 실상을 보니까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정책은 디테일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가 그렇게 열심히 2년간 가르친 제자의 삶 하나도 바꾸기 쉽지 않구나 하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그때가 제가 배나사를 시작한지 4년차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1년 정도를 트라우마로 무너져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새누리당 최고위원격인 비대위원 제안이 왔어요. 그때 문득 '그래, 내가 여당의 넘버2, 3가 되면 이걸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꿈꾸는 청년은 멈추지 않는다
 
표창원: 참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잖아요? 경력을 보면 하버드대에서 컴퓨터공학과 경제학을 전공했고, 한국에서 스티브잡스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길을 들어서지 않았다면 어떤 길을 걷고 어떤 꿈을 꿨을까요?
 
이준석: 제가 군대를 병특으로 간 이유가 꼭 IT업계로 가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병특을 마치고 1년 정도 회사를 하고 나서 바로 정치권 제안이 온 거죠. 그 부분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요.
제 인생에 27년은 IT쪽에서 성공해보겠다는 준비가 많았는데 반대로 제가 준비하지 않았던 부분의 성공에 대해서 움찔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또 더더욱 내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방송이라는 영역에서 성공하게 된다면 진짜 인생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제가 31살에 이런 이야기 하기도 웃기지만 제 산만함이라는 것? 제 장점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어딜 가든지 평균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것, 업종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웃음) 제가 미디어에서 활동하면서 PD나 작가들과 밥도 많이 먹고 하는 이유는 나중에 정치를 한다면 진짜 전업으로 잘해보고 싶어서예요.
그러자면 미디어 지형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전달력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좋은 공부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 종합편성채널이나 케이블방송을 많이 하다 보니까 시청률 표를 많이 들여다 보고 하는데 '내가 어떤 식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했을 때 전달력이 높고, 시청자들이 좋아해주는가?’를 생각하게 되요. 저는 이미 매일매일 선거를 치르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그 작은 선거들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가 있었는데 정치를 전업으로 하는 순간 그런 공부가 끊길까봐 그런 게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표창원: 그럼 지금 이 시점에서 31살 청년 정치인, 방송인 이준석의 꿈은 어떤 건가요?
 
이준석: 제 꿈이라고 한다면, 제가 아까 말한 '배나사’라는 단체가 '이왕 할거면 대한민국을 한 번 정복해보자.'라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꿈을 이루는 가운데 여러 가지 과정들을 겪어보고 싶어요. 제가 방송으로 쌓아온 것을 어디에 털어줄까 하는 것도 고민의 과정이에요. 제가 출마선언을 하면서 제 방송으로 얻은 인지도나 모든 것을 정치행보에 넣을 수도 있고요. 반대로 불출마 선언을 함으로써 앞으로 출마를 하기 보다는 좀 더 해보고 싶은 배나사에서 성과를 내고 싶다고 하면 여기에 또 관심이 몰리겠죠. 
저는 아직도 그 고민을 진지하게 해요. 앞으로 또 4년이라는 시간이 있을 텐데 앞으로 4년을 또 어떻게 쓸지 그리고 거기에 여러 변수들이 있어서 흔들리죠. 나간다고 하면 나간다고 비판이 있을 것이고 안 나간다고 하면 쫄아서 안 나간다고 하는 비판도 있을 것이고.(웃음)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고민들 때문에 헷갈립니다.
 
표창원: 마지막으로 이준석 위원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비난만 하는 분들도 있죠, 언론도 있고요. 그런 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 있어요?
 
이준석: 저는 여야를 막론하고 청년 정치인중에 강하게 큰 편이에요. 과거에는 그런 게 있었어요. 과거에는 제 캡쳐 사진 하나 올려놓고 "이준석이 헛소리 했습니다." 하면 "역시 새누리당 종자답군요." 하는 식의 댓글들이 달리곤 했어요. 근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하는 방송을 몇 번씩 봤을 것이고 제가 나와서 진짜 이상한 헛소리 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거든요. 오히려 그런 거 하면 요즘은 "앞뒤 맥락 자르고 가져오지 마세요." 이런 댓글이 달리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역시 긴 텀으로 봐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저를 비판하시는 분들도 아마 움찔움찔 놀라는 지점들이 있을 거예요. 저를 박근혜 키즈로만 생각했던 분들은 유승민 원내대표 파동이라던지 과거 윤창중 비판할 때도 그렇고 당시에는 '코스프레 하냐?' 이랬겠지만 좀 있으면 어느 쪽이 더 제가 항상 하고 있는 생각과 가까운지 보게 되실 거예요. 그러면은 지금 과는 다른 지점에 대해 저한테 궁금해 하시는 것들이 생길 거예요. 그러면 그때 언제든지 성실하게 답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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